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제2차: [[덴마크]] 전쟁 ([[1625년]] ~ [[1629년]]) == [youtube(bq0tpUuWkgc)] 여기서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5세]]를 적절하게 용서해 주라는 청원도 있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거부했고 프리드리히 5세의 작위를 파면한 다음, 그의 영지를 몰수하였으며, 기존의 그의 영지와 작위를 막시밀리안 1세에게 하사하였다. 이는 프리드리히 5세가 대외의 개신교국가들에게 가톨릭을 신봉하는 절대 권력의 황제 출연을 경고한 꼴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경각심을 사게 된다. 특히 프랑스는 자신들의 전략적 안보와 연결된 라인팔츠 지대에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이 들어서게 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 무렵 집권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잉글랜드 - 프랑스 - 네덜란드 - 덴마크 - 스웨덴의 연합으로 합스부르크를 억누르려 시도했다. 잉글랜드는 제임스 1세가 사위의 복권을 바라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독립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 배후의 북독일 지역에 강력한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직접적인 개입을 꺼렸으며[* 프랑스는 이탈리아 합스부르크령의 주요 요충지인 발텔리나를 임시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위그노 반란이 터지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내세웠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누가 작전 지휘권을 가지는가의 문제로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스웨덴은 개입을 위해 전쟁 중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까지 맺은 상태였으나, 정작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덴마크[*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왕비 앤은 제임스 1세의 누이였다.]를 지지했다. 이에 빡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재개하면서 동맹에서 이탈했고, 덴마크만이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같은 가까운 독일 영토를 두고 신성 로마 제국의 북쪽 제후국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전쟁으로 제국이 혼란해진 틈을 타 크리스티안 4세는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후원을 업고 제국 북부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제국 내 루터파 신도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왔으나 실제 목적은 당연히 북독일 일대를 장악해 [[발트해]]를 덴마크의 내해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페르디난트 2세는 황제군의 수장으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가톨릭 연합세력인 가톨릭 리그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수장으로 하여 덴마크군에 맞섰다. 반대편에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의 용병대,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크리스티안이 나왔다. 틸리와 발렌슈타인이라는 드림팀 앞에서 덴마크군은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크리스티안 4세의 군사적 능력은 이들을 당해내기에는 영 모자랐고[* 크리스티안 4세가 무능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1611년 칼마르 전쟁에서 그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꽤 능력은 괜찮은 인물이었다. 물론 이때의 구스타브 2세는 당시 16세로 갓 왕위에 올라 경험도 부족했고 스웨덴군 또한 그 유명한 군제개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강군이라 보긴 어려웠기 때문에 30년 전쟁 시점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당시 크리스티안 4세의 승리는 군사적인 승리가 아닌, 스웨덴군의 전선이 덴마크와 루스 차르국으로 갈라진 것을 이용한 편승에 가까웠다.], 만스펠트는 새롭게 제국군을 맡은 발렌슈타인을 깔보았다가 데사우 전투에서 대판 깨지며[* 이 무렵의 발렌슈타인은 아직 전공이 별로 없었고, 반대파도 많아 지휘권을 빼앗길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은 이 전투에 꽤 많은 것을 걸어야 했고, 그 도박이 성공하여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요청하러 가다 급사하면서 역사에서 퇴장한다. 연전연패한 덴마크는 심지어 본토인 [[유틀란트 반도]]까지 유린당했고, [[덴마크 해군|해군]]을 앞세워 북독일 해안가를 약탈하는 전법으로 맞서지만 대세를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덴마크군은 이 전쟁에서 패한 뒤, 뤼베크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에 '''대단히 관대한 조건들'''을 제시했다. > 1. 앞으로 덴마크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개입할 때는 덴마크 왕이 아닌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의 자격으로만 개입할 수 있다. > 1. 전쟁 배상금은 없다. > 1. 포로는 즉시 교환한다. 덴마크 전역을 유린하고 있는 승자의 요구라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관대한 조건이었다. 그 덕분인지 덴마크는 3차 전쟁기에 중립을 지켰으며, 4차 전쟁기에는 오히려 가톨릭측에 가담했다가 토르스텐손 등의 스웨덴을 주축으로 하는 개신교 군에게 안드로메다 관광 열차를 타게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